1.


ㅡ사건발생 5일 전.




" ..  여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만 가 봐. "

태연은 범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지난 일주일간의 고생이 헛되지 않게 드디어 꼬리가 잡힌 범인이기에 그 낯짝 한 번 구경하려는 심사라고 하기에는 태연의 성격상 그렇지도 않을뿐더러 그가 정인에게 툭 던진 말을 보더라도 일부러 그녀에게 눈길을 주지 않으려는 모양이었다. 네?! 반문하듯 튀어나오는 정인의 당황에,

" 그만 가보라고. 다시 말해줘? "

특유의 싸늘한 기운이 감도는 취조실에서 그 못지않게 피어나는 태연의 차가움ㅡ.

언젠가 이런 적이 있었다. 실종됐던 윤 변호사가 느닷없이 나타났던 그날, 누구보다 먼저 그녀를 만나고선 사건의 정황을 듣고자 심문을 막 하려던 그 순간. 여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만 가봐.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말하던 태연. 차갑다. 냉정하다. 이유도 모른 채 나가야만 했던 그때도 그리 느끼긴 했지만, 그녀가 여동생 피살사건과 관련이 있었기에 직접 얘기를 나누고 싶었을 그의 마음을 나중에서라도 이해한 만큼 서러울 것도 없었다. 되려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같은 장소 다른 시간에 맞닥뜨린 지금의 태연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

" ...................................... "

언뜻 마주친 시선 속에 담긴 거부의 사인. 차라리 대놓고 뿌리치는 게 나을까. 관심 두지 마라, 그런 말이라도 들으면 포기가 될까. 한 번도 말 한 적 없는 제 마음을 이미 안다는 듯 무언으로 밀어내고 외면하는 그에게 이젠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그날' 시선 속에 오갔던 그 마음, 퍼붓는 빗줄기 아래 솟구치는 불길을 등진 채 마주한 그 눈빛은 오롯이 자신이 만들어낸 착각일까. 그 상황이 너무 드라마틱해서 환상에 빠져버린 걸까. 차마 손을 잡아주지는 못했지만, 지치고 힘들었을 때 어깨를 빌려줄 수 있는 딱 그만큼의 관계를 원하는 게 잘못된 걸까.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도 이 남자, 민태연의 마음을 알 수가 없다.

ㅡ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멀어진 듯한 관계. 그의 머릿속을 엿볼 수만 있다면.

" ... 저기, 유 검.. 아니, 유 검사가 이해 좀 해주라. "

취조실에선 무리 없이 심문이 이루어졌다. 사건정황과 증거물, 그리고 태연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을 합법적인 협박까지 더해져 범인이 도망갈 여지마저 차단했다. 이대로 계속 진행된다면 사건 종결이 코앞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취조실 너머의 상황은 오히려 그 반대인 듯 숨소리마저 긴장했다.

" .. 쟤가 원체 쌀쌀맞잖아. 원래 그런 녀석이야. 그리고 최근에는 저놈 때문에 고생도 많았으니까.. 그건 유 검사가 누구보다 잘 알잖아. 그치? "

취조실을 응시하는, 아니 태연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정인의 곁에서 순범이 안절부절못했다. 태연을 위한 변호를 해보지만, 전부 궁상스러운 변명일 뿐. 민태연, 이 자식. 그러니까 좀 살살 대하라니까. 더럽게 말을 안 들어요, 아주.

" .. 고생은, 모두 다 함께 했죠. 황 형사님도 밤잠 설쳐가며 범인을 뒤쫓아잖아요. "

" 아, 그럼.. 다 고생했지. 내 고생을 우리 유 검이 알아주니 진짜 황송할 만큼 고마운데. 그래도 특별히, 조금 더 고생한 사람을 따지자면.. 저 녀석이.. "

" 그런 거 따지면 누가 검사하겠어요! "

" .............................................. "

끔벅끔벅. 가차없는 정인의 말에 순범은 입만 벙끗거렸다. 무슨 말을 해도 통할 것 같지가 않다. 망할 자식. 아주 날 매장해라, 매장. 정인을 향한 태연의 차가운 태도가 어디서 비롯됐는지, 그 마음이 어떤지 짐작이 가는 만큼 이해 못 할 것도 없지만, 이런 상황에 맞닥뜨릴 때면 결국 속으로 망할 민태연을 부르짖으며 험담을 늘어놓고 마는 그였다. 온갖 무서운 별명이 붙어도 이상할 게 없을 형사생활 20년도 '민태연'과 '유정인' 사이에 일어나는 문제 앞에선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순범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인은 여전히 태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

" .. 왜? "

그녀의 현재 기분이 한껏 묻어나는 단답형. 시시한 얘기면 너 맞는다? 싸늘한 정인의 눈총이 이어졌다. 설마 버릇없이 손윗사람에게 이러지는 않을 터, 또한 그녀가 취조실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전화할 사람이라면, 그래서 이처럼 애꿎은 샌드백이 된 이라면, 필시.

" 유 검, 동만이야? "

" .. 네. 저희 쪽으로 사건이 넘어왔다고 지금 부장님이 부르신다네요. "

" 그럼 태연이를 불러야 하나? "

" 제가 갔다 오죠. "

정인이 이상윤 부장한테서 받아온 사건은 연쇄 살인이었다. 예리한 칼로 목을 긋고 복부를 난도질한 후에 혀를 자르고 손목을 절단하는 잔혹한 살해행위. 열흘 간격으로 피해자 넷이 죽었다. 그중에 한 명, 네 번째 희생자는 불행하게도 이 사건의 담당자였다. 뚜렷한 목적이 있다기보다는 그저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지는 살인. 담당형사마저 살해할 정도로 대담하고 잔인한 살인마. 실로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살육의 현장이었다.

" 하여간 웃대가리들이 하는 짓이란.. 아직 맡은 사건도 안 끝났는데 또 뭔 사건이야. 것도 요따위로 떠넘기기나 하고. "

" 그만큼 머리 아픈 사건인가 보죠. 죽이는 방법이 꽤 살벌하네요. 목을 긋고 복부를 난도질해서 충분히 고통스럽게 만든 후에 혀를 자르고 한쪽 손목을 절단한다... 죽는 순간까지 극한의 고통을 주겠다는 건가? 사진을 보아하니.. "

정인이 사건 파일 안에서 피해자들의 사진을 집어올렸다. 피를 뒤집어쓰다시피한 피해자들은 모두 손목이 깔끔하게 절단된 상태였다. 이 정도로 신체를 정확하게 자를 수 있다는 건 최소한 범인이 어설프게 살인마 흉내를 내는 자는 아니라는 것. 의학 쪽에 몸담고 있거나 그쪽으로 전문가 못지않은 자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 .. 살인을 즐기는 정신이상자의 소행인가? "

휙. 태연이 정인의 손에 들린 사진을 양해 없이 가져갔다. 마땅찮은 기색이 역력한 정인이지만, 태연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결벽증이라도 있는 건가? 어지간히도 깔끔하군. 유정인, 사건 파일 줘 봐. 순범에게 사진을 건넨 태연은 정인이 채 내밀기도 전에 사건 파일을 뺏다시피 했다. 휙휙, 잘도 넘어가는 페이지는 그가 제대로 읽기나 하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빨랐다.

" 민 검사님. "

" 황 형은 저놈 마무리 잘하고. "

정인의 부름에 아랑곳없이 태연은 고갯짓으로 취조실 안 범인을 가리킨 다음 곧장 전화를 걸었다. 최동만, 사람 좀 찾아봐. 이름은 차서희. 이번 사건 마지막 희생자야.

" ... 민 검사님."

" 황 형, 지금 맡은 사건 마무리되는 대로 이 살인사건 수사하지. "

" 어.. 그러지 뭐. "

" 민 검사님! "

" ... 그리고 유정인. "

지시사항을 모두 내리고 드디어 태연의 시선이 정인을 향했다. 이제야 부름에 답하려는 것인가, 싶은 것도 잠시. 넌 당분간 쉬어. 어이가 없을 정도로 단호한 한마디였다. 지금 뭐라고 하신 거죠? 내지는, 그 말 무슨 뜻이죠? 그렇게 정인이 되묻기도 전에 태연은 쐐기를 박았다.

" 감기 기운 있는 거 알아. 그동안 일하느라 바쁘기도 했으니까, 오늘부터 넌 휴가야. 딴 생각하지 말고 그냥 푹 쉬어. 이건 팀장의 명령이야. 절대로 토 달지 마. "

데자뷔도 이 정도까지라면 이미 기정사실이 아닐까. 기가 막힌 상황에 정인의 꽉 다문 입술이 그 눈동자만큼이나 불만을 품고 있었다. 안다. 잘 안다. 그가 모를 리가 없다. 정인이 가장 싫어하는 게 무엇인지, 그녀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태연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답할 리가 또한 없다. 언젠가 정인이 조심스럽게 건네던 그 말, 왜 그렇게 차갑게 대하느냐는 물음에 대답할 수 없어서 외면하고 말았던 것처럼,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 민 검, 너 정말.. 아, 진짜.. "

차갑게 뒤돌아서는 정인과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오롯이 바라보는 태연을 번갈아 보던 순범이 안타깝다는 듯이,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아주 얄밉다는 듯이 태연을 윽박질렀다. 하지만 어쩌랴. 있는 대로 속내를 퍼붓기에는 태연의 그 마음이 눈에 밟힐 뿐이니. 동만이한테 하듯이 뒤통수를 쳐댈 수도 없는 노릇. 말을 말자, 말을. 순범은 혀를 끌끌 차며 취조실로 들어가버렸다.


2.


ㅡ사건발생 다음날, 현재.




블라인드를 쳐놓은 창가에서는 미세한 빛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지금이 밤인지 낮인지 알아챌 수 없는 그곳, 검경합동수사본부 내에서 유독 정인의 눈길을 많이 받았던 팀장실은 어둠이 자욱한 채 마치 밀실처럼 모든 걸 삼키고 있었다. 째깍, 째깍. 규칙적으로 울리는 시계 소리는 흡사 공포영화에서 긴장감이 고조되는 장면에 주로 등장하는 효과음과 같았다.

삐거덕. 의자에 드리워진 인영(人影)ㅡ태연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어둠을 타던 눈동자는 일순간 푸르게 빛을 발하며, 방금까지 보고 있던 서류 하나를 던지듯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창가로 향하는 듯싶던 걸음이 이내 멈추고, 차갑게 식은 눈동자가 시선을 돌렸다. 책상 위 서류. 팀원들의 정보가 세세히 적힌 인사기록부. 사뭇 눈에 밟히는 이름 석 자, '유정인'. 지난 시간이 칼날이 되어 제 가슴을 헤집어대는 것도 '유정인' 때문이리라. 아무것도 아니었을 만남이 이렇듯 질긴 인연으로 변할 줄 그때는 알았을까. 아니, 지금이라도 느끼고 있을까.

『 민태연. 너, 이대로 괜찮은 거냐? 』

유정인을 상대로 한, 자문자답(自問自答)ㅡ그 시작은,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다. 두 번째 역시 마찬가지. 세 번째, 네 번째, 계속 이어지는 질문에도 대답은 매한가지. 하지만 '그날' 이후로는, 괜찮다고 답할 자신이 없다. 그리고 지금은ㅡ.

" ......... 그런 질문 자체가 이미 위험한 건지도. "

" .. 무슨 질문이 얼 만큼 위험한지는 모르겠다마는, 야~ 살다 살다 천하의 민태연이 제대로 청승 떠는 모습도 다 보고-! "

언제 왔던 것일까. 순범이 문에 기대선 채 태연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불쑥 던진 그 한마디처럼 입매는 장난스럽게 올라간 상태였다. 순범은 성큼 걸어와서는 블라인드를 젖히며 힐끔 태연에게 시선을 던졌다.

"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고 하던데.. 어이, 민 검.. 설마 아니지? 어? "

" 황 형도 참.. "

순범의 너스레에 태연은 절로 웃음 짓고 말았다. 형사생활 20년이라는 경력이나 저 커다란 덩치와는 다르게 순범은 사람을 웃게 하는 기질이 다분했다. 어찌 보면 능글맞다고 표현할 수도 있을 저 성격은 오랜 형사생활로 말미암아 몸에 밴 일종의 처세술인지도 모르지만, 늘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태연에게는 잠시나마 마음의 여유를 찾게 해주는 고마운 것이기도 했다. 자신이 뱀파이어가 된 것을 알고서도 전혀 스스럼없던 모습. '민태연'이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도 사실 그런 순범의 덕이 컸다.

" 동만이는 어때? 범인의 윤곽은 보이는 것 같아? "

" 말도 마라. 안 그래도 그 녀석, 뭐 대단한 걸 발견이라도 했는지 기대하라고 큰소리 뻥뻥 치는데.. 눈이 완전히 돌아갔다니까.. "

" 최동만 정보력이야 이미 알아주잖아. "

" 그놈이 정보 잘 꿰차는 거야 나도 알지. 그러니까 우리 팀에 들어왔겠지. 뭐, 인턴이라는 말단 딱지가 붙긴 했지만. 고놈에게는 아주 과분한 처사지. 암암.. 아, 이놈 봐라..?! "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그새를 못 참고 울려대는 전화ㅡ액정 화면에 선명히 뜬 이름 '똥만이'에 순범은 한참을 뜸 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황 형사님, 왜 이제야 받아요? 일부러 늦게 받으신 거 아니에요? 벨 소리 끝나기가 무섭게 앵알거리는 '똥만이'의 음성. 늦게 받기는 누가 늦게 받았다고 그래. 순범이 아닌 척 능청을 떨자 연타로 달려드는 '똥만이'. 아, 이놈이. 알았어, 간다고 가.

" .. 민 검, 동만이가 어서 오란다. 그놈 말을 고대로 빌리자면, 꽁지가 불이 나도록 달려오랜다. "

순범이 전화를 끊는 사이, 태연의 휴대폰 벨이 울렸다. 뭐야? 이놈이 그새를 못 참고 너한테 전화한 거야? 순범의 눈이 심히 의심스럽다는 듯이 변했다. 아닌 것 같은데? 태연은 아무 이름도 뜨지 않는 액정화면ㅡ정확히는 '발신자표시제한'이라는 문구를 순범에게 슬쩍 보여주고선 전화를 받았다.

" ... 네, 민태연입니다. "

『 ......................... 』

" ..... 여보세요? "

『 ......................... 』

" 전화를 거셨으면 말씀을 하... "

『 ... 민 검사.. 님.. 』

" ........ 유정인?! "

스스로 말하고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태연의 목소리. 반사적으로 순범의 고개가 돌아갔다. 태연을 바라보는 두 눈은 놀라움 정도가 아니라 거의 경악 수준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 정인의 전화를 받은 태연도, 그 모습을 지켜보는 순범도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 그 자리에 못 박혔다.

" .. 몸은 어때? 괜찮은 거야, 유정인? 말할 수 있겠어? "

『 ... 안 괜찮아,요.. 아파..요... 전부,다... 』

정인의 힘없는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온몸에 가득할 상처, 그 고통을 고스란히 전하듯 정인은 자꾸만 말을 잘랐다. 아프다는 그 짧은 한마디를 하기가 그렇게나 힘이 든 그녀였다. 태연은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젠장. 빌어먹을. 당장에라도 소리가 되어 나올 욕지거리가 입안을 맴돌았다. 범인이 보낸 두 번째 소포에서 본 사진 속 정인의 모습이 그의 눈앞에 그려지듯 떠올라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 .. 그래.. 아플 거야. 조금만 참아. 조금만 참으면 돼. 그럴 수 있지? "

『 .................................. 』

" ... 유정인? 지금 내 말 듣고 있어? "

『 .. 아아, 유정인은 못 들어도 난 듣고 있어, 민태연. 』

태연의 얼굴이 흡사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일순간 굳었다. 일말의 감정마저 지워진 얼굴은 핏기 하나 보이지 않았다. 범인은 그런 태연을 이미 안다는 듯 느긋하게, 즐거움을 숨기지 않고서 목소리를 울렸다.

『 첫대면이 전화상이라니 예의가 아닌 줄은 알지만, 지금쯤이면 이 여자의 목소리 정도는 들려줘야 할 것 같아서 말이지. 그런데 보통 이런 전화를 받으면 범인이나 은닉장소에 대해서 물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아주 절절한 음성을 듣자니 내가 다 미안해지려고 하네. 킥킥.. 』

" ..................... 너, 원하는 게 대체 뭐야? "

『 밑도 끝도 없이 들이밀다니, 어지간히 급하셨구먼. 』

" .. 말 돌리지 말고 말해. "

『 .. 뭔가 착각한 모양인데, 난 원하는 거 없어. 』

" 착각? 원하는 게 없어? 지금, 그 말을 나더러 믿으라고? "

애초에 살인사건과 전혀 무관한 정인을 납치했다는 것이, 아니, 오랜 시간 동안 정인의 일거수일투족을 훔쳐보며 사진을 찍어댄 것부터가 복수와는 또 다른 목적이 있다는 의미였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보낸 메시지들. 도발을 넘어 마음 깊숙이 자리한 어둠을 건드리는 글귀는 분명히 '민태연'을 겨냥한 것이었다. 증오, 미움, 분노. 이유는 알 수 없어도, 필시 범인은 '민태연'에게 그러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달리 원하는 게 없다? 이거야말로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다.

『 정말인데, 안 믿는 모양이네. 』

" .. 헛소리는 이쯤에서 집어치우고 어서 말해-!! "

『 큭큭.. 이런.. 격하게 반응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잖아요, 민태연 검사님. 다시 말하지만, 원하는 거 없어. 그래, 유정인에게 원하는 건 없어. 민태연, 당신에게는 있지만. 』

" .............. 그러니까, 말하라고. "

『 글쎄.. 미리 말하면 재미없잖아. 안 그래? 』

놈은 미끼 같은 단어를 던져가며 말꼬리를 잡아서 상대방을 제 페이스로 이끌어간다. 감정적이 될 수밖에 없도록 유도하는 교묘한 화술. 그러면서 정작 상대방이 알고자 하는 중요한 사실은 말하지 않는다. '민태연'을 향한 놈의 분노는 이성적 판단이 끼어들 수 없는 순수한 감정 그 자체지만, 놈은 철저하게 지능적이다.

『 왜? 여자가 걱정돼서 그래? 내가 어떻게 할까 봐서? 』

" ................................. "

『 피가 마르는 기분이지..? 아주 애간장이 녹을 것 같지?.. 그럴 만도 할 거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로 당신 때문에 이런 위험한 일을 겪고 있으니.. 따지고 보면 이 여자도 참 안 됐어. 어쩌다가 민태연과 엮여서는 험한 꼴이나 당하고... 이대로 죽는다면, 뭐 억울하지만 어쩌겠어... 』

" 네 말대로야. 네가 죽이고 싶은 상대는 민태연이지, 유정인은 아무 상관 없잖아. 그런데 왜, 유정인에게 그런 짓을 하는 거지? "

『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니겠어? 민태연이 마음에 담은 여자니까-! 그 하나만으로도 죽을 이유는 충분해. 이대로 심장에 칼을 꽂아 버릴까.. 아니면 양 손목을 그어버릴까.. 어떤 식으로 죽일지, 그 생각을 하자면 소름 끼치게 행복한 거 모르지? 상상도 못하겠지?! 』

범인의 음성은 자꾸만 들떴다. 기분 좋은 웃음도 잔뜩 묻어나왔다. 살인, 그 자체가 즐거운 것인지 아니면 정인의 죽어가는 모습이 만족스러운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놈은 분명히 황홀해하고 있다. 스스로 살인을 저지르는 행위에 상상만으로 쾌감을 느끼고 있다. 위험하다. 다분히 사이코패스 적이다. 이건 다시 말해서, 놈이 '민태연'에게 품은 감정이 그만큼 깊다는 걸 반증한다. 어디서 어떻게 엮인 걸까. 어째서 이 같은 일이 벌어진 걸까. 왜, 하필 '유정인'일까. 반문해도 소용없는 질문들만 머릿속을 맴돈다.

" ...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군. 아직도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

『 킥.. 내게 거짓말이 통할 거로 생각했어? 당신이 아무리 그래 봤자 난 못 속여. 민태연, 난 말이지.. 당신보다 더 당신 마음을 잘 알아. 아니, 훤히 보여. 아주 질릴 정도로. 그러니 당신도 내 절망을 느껴봐야 해. 그리고 우리 현수가 받았던 고통도... 』

웃음으로 일관하던 범인의 목소리가 서서히 떨렸다. 착각하려야 할 수 없을 만큼 확실하게, '현수'라는 이름 앞에선 지금껏 놈이 쓰고 있던 지능적인 살인마의 가면이 벗겨져 버렸다.

『 ... '그날'이었어.. 7년 전 '그날'.. 바로 '그날'에, 내 삶이 끝났어. 알아? '그날' 이후로 평온한 내 삶이.. 우리 현수가...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다고-!! 그저 거기 있었던 것뿐인데-!! 이유도 없이, 나를 짓밟았어-! 내게서 현수를 뺏어갔어-! 왜 나였는데-!! 그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나였냐고-!! 왜---!! 』

놈이, 울부짖었다. 대지를 갈라 모든 걸 삼켜버릴 듯한 통곡. 마치 자식을 뺏긴 어미가 그러하듯 처절하게 제 속을 드러냈다. 아프다. 아파서 당장에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다. 먹먹한 가슴이 찢겨나간다. 7년 전 그날, 싸늘하게 식어 저를 반기던 여동생의 시신. 불러도 대답없는 연지를 앞에 두고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범인을 향한 미칠듯한 분노와 증오가 오롯이 가슴속에 차버린 채 그저 무수히 되뇌던 그 말ㅡ왜 하필 나였냐고, 그 많은 사람 중에 왜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 거냐고. 연지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자신을 좀먹어 가는 만큼 세상을 향한 원망도 깊어갔다.

ㅡ놈은, '민태연'과 닮았다. 가면 아래 숨긴 놈의 진심은 '민태연'의 또 다른 얼굴이다.

뚜-뚜-. 휴대폰은 종료음만 무성하게 울렸다. 범인의 목소리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태연의 귓가에는 여전히 놈의 처절한 음성이 떠나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7년 전 연지의 죽음과 시간을 돌아 다시 만난 연지가 어지럽게 교차했다.

" .. 유정인... "

정인을 납치하고 그 몸과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힌 놈이다. 또한, 언제라도 그녀를 죽일 수 있는 위험한 놈이다. 당장 숨통을 끊어도 시원치 않을 살인마다. 하지만ㅡ.

『 ... 미안하다, 유정인.. 정말로 미안하다.. 』

" ... 태연아.. "

순범은 적잖이 당황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를 불러보지만, 선뜻 곁으로 다가가지는 못했다. 태연을 알아온 이래 웬만큼 그에 대해 안다고 자부했다. 태연이 그 어떤 얼굴을 보이더라도 육감적으로 속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범인이 제멋대로 소리치고 전화를 끊어버린 이 순간, 저 '민태연'의 얼굴은, '유정인'을 부르는 그 목소리는, 순범도 처음 만나는 생소한 감정이었다. 과연 범인이 뭐라고 했기에 태연이 저러는 것인지, 전혀 감조차 잡을 수가 없었다.

by 아르튀르 | fanfic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