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요한 어둠 속에서 바람이 물결 칠 때,
   이름을 잃어버린 자들은 머물 곳을 찾아 헤매고,
   그들을 쫓는 자들은 출구 없는 굴레를 맴돈다.

   찢긴 운명과 끝없는 시간의 교차점 아래,
   마주 잡은 손이 살아가는 이유가 되어버린 채,
   덧없는 소망만이 소용돌이를 친다. 」







벚꽃은 또다시 흩날리고...

- DTB, Subsequently -

Hei x Yin
2008.03.20 by arthur siyue






자정을 향해가는 야심한 밤,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는 온갖 형용 색색의 불빛으로 물들어 밤 특유의 아름다움을 과시하며 사람들을 유혹했다. 그 유혹에 이끌려 낮을 잊은 채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표정으로 도시를 메웠다. 끝날 것 같지 않은 어둠이지만 누구도 거부하지 않는 모순. 헤이는 그들과는 섞이지 못한 채 자신만의 기나긴 밤을 시작했다.


青い青い空に月の光をともす
    푸르고 푸른 하늘에 달의 빛을 켜요

    甘く淡く重いそんなものに捉われて
    달콤하고 덧없고 무거운 그런 것에 사로잡혀서



" 오늘 하루도 수고했어, 진. "

손님이 모두 빠져나간 폐점시간. 카츠오는 헤이의 어깨를 툭 치며 인사를 건넸다. 점원을 구한다는 구인광고를 보고 왔다고 했을 때만 해도 멀쩡해 보이는 허울대와는 달리 실실 웃는 모양새가 어쩐지 속없는 사람 같았는데, 밑져야 본전이겠지 싶은 마음으로 일을 맡긴 후로 곧잘 제 몫을 해내는 녀석이 마음에 들었다. 물론 일을 한 지 두 달이 되도록 사생활에 관해선 일절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사연이 있는 사람인 듯했으나, 오랜 장사꾼의 직감으로 굳이 물어볼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

" 카츠오 씨도 수고하셨습니다. "

헤이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게이트 사건 후로 '리셴슌'이라는 위장인물을 연기할 필요는 없어졌지만, 상당기간 위장한 채 지내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리셴슌의 모습이 배어버렸다. 그래서 조직과 공안부에 쫓기는 관계로 다른 가명을 사용하게 되었어도 타인을 대할 때는 으레 리셴슌이 튀어나왔다. 그 모습이 마치 떨칠 수 없는 과거의 망령처럼 느껴져 씁쓸하지만, 익숙하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었다.


いつもいつもそばで信じてゆく力が
    언제나 언제나 곁에서 믿어온 힘이

    遠く脆いものを動かしてる気がした
    멀고 여린 무언가를 움직이는 기분이 들었어요



" 진, 오늘 한 잔 어때? "

카츠오가 손짓으로 술을 들이켜며 눈을 빛냈다. 술고래로 소문난 사람답게 심심찮으면 헤이에게 술을 권하는 그였다.

"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오늘은 안 되겠는데요? "
" 오늘은 안 되겠는데요,가 아니라 '오늘도'겠지. 안 그래? "

헤이의 거절에 카츠오는 그럴 줄 알았다며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집에 신줏단지라도 모셔놨는지 항상 일이 끝나는 대로 돌아가는 칼 같은 성격이었다. 한 번도 자신의 제안에 응하지 않는 게 야속할 만도 하지만 성실해서 손해를 볼 것은 없다는 생각에 지금처럼 웃고 말았다. 어쩌면 정말로 기다리는 누군가-자신의 아내처럼 잔소리를 해대는 여자가 있는 지도.

"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

가벼운 목례 끝에 울리는 의미불명의 한마디, '도망가지 않게 잘해.'라는 카츠오의 배웅을 받으며 헤이는 거리로 나왔다. 오늘따라 구름에 가려 빛을 잃은 별들이 헤이의 상실감을 부추겼다. 진짜 별을 잃어버린 밤하늘은 여전히 변함이 없는데도 자신은 더는 계약자가 아니다. 아니, 여전히 계약자이기는 하지만 계약자로 불릴 수 없게 돼버렸다. 그날의 선택을 후회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아직도 명확히 알 수가 없다. 삶의 목표를 잃은 채 깊은 상실감 속에서 그저 '지금의 자신'을 살아가는 것뿐이다.


この月明かりの下ひとり知れず
    이 달빛 아래 혼자라는 걸 모른 채

    君の名前だけを呼んでいた
    그대의 이름만을 부르고 있었어요



문득 헤이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각종 액세서리를 파는 거리의 노점상.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물건을 파는 것인지 새삼 의문이 들긴 했으나 헤이의 신경은 금세 액세서리로 향했다. 큐빅이 박힌 작은 머리핀에서부터 하늘거리는 레이스가 예쁜 머릿줄까지, 여성들이 좋아할 갖가지 장신구로 가득했다. 왜 시선이 여기로 향했는지 예전의 자신이라면 하지 않을 행동이지만, 누군가의 눈동자를 닮은 자줏빛 머리핀 하나가 곧 그런 생각을 잊어버리게 했다.

" 애인한테 선물 하시게요? "

물끄러미 헤이를 바라보던 노점상 주인이 말을 걸어왔다. 장사꾼으로 손님을 한 명이라도 더 잡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간혹 보게 되는 이런 부류의 손님은 괜히 흥미가 생겨서라도 말을 붙여보곤 하였다. 물론 이렇게 물으면 아니라고 고개를 내젓는 게 공통된 반응이었다.

" 그런 거 아닙니다. "
" 자자, 쑥스러워하지 말고 골라보세요. "

멋쩍은 듯 헤이가 웃으며 돌아서려고 하자, 노점상 주인은 역시나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다며 자판대를 툭툭 쳤다. 그리고는 말과는 다르게 얼른 머리핀 하나를 들어 올리고선 빙긋이 웃었다. 헤이의 시선이 머물렀던 바로 그 자줏빛 머리핀이었다.

" 보아하니 요 머리핀에 시선을 계속 주던데 이게 마음에 든 모양이죠? 애인한테 잘 어울리는 색인가 보네요. 그런데 이런 색은 어울리기가 쉽지 않은데 애인이 상당한 미인인가 봅니다. 망설이지 말고 선물해 보는 게 어때요? "

주인의 상술 같은 말솜씨가 쉴 새 없이 쏟아졌다. 결국 헤이가 그 자리를 모면하게 되는 것은 머리핀을 산 후였다.


いつまでもミライを探してたこの光の中に...
    언제까지나 미래를 찾고 있었죠 이 빛 속에서...



떠밀리듯 사고만 머리핀을 바라보는 헤이의 얼굴엔 다소 난감함이 서렸다. 자신과는 하등 관련없는 물건을 '샀다'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당황하기에 충분하지만, 그보다 더 당혹스러운 것은 '그녀'를 떠올렸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정말은, 과연 이걸 그녀에게 전해줄 수 있을까 싶은 자신의 마음이었다. 계약자답지 않다는 말을 숱하게 들어온 자신이지만 지금은 차라리 계약자다웠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헤이는 머리핀을 주머니 속으로 밀어넣으며 쓰게 웃고 말았다.

게이트에서 살아남은 이후 갈 곳도 머물 곳도 없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어디에도 갈 수 있는 자유를 손에 넣었다. 그러나 언제 조직에 발각될지 모른다는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기에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혼자 도망을 다니기에도 벅찬 상황에 타인을 대동한다는 건 무모한 짓인지도 몰랐다. 한 팀으로 일을 했다는 과거만이 있을 뿐, 그 무엇도 연결고리가 없는 그녀였다. 그런데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그 눈동자에 서린 감정을 찾게 되었던 것이. 다시 생각해 봐도 의심투성이에 모순 덩어리였다.


何もつかめないような夜には
    아무것도 잡히지 않을 듯한 밤에는

    君を思わないときはない
    그대를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어요



" ........... 인? "

헤이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다리 사이로 유유히 흐르는 물줄기를 타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인의 관측령이었다. 인간형으로 변화된 그녀의 관측령은 헤이에게 손짓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생각에 빠져 미처 보지 못했는데 100m 전방이 이미 어둠 속에 갇혀 있었다. 헤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설마 벌써 발각된 건가ㅡ.

관측령을 따라 달리는 헤이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앞을 보지 못하는 그녀가 계약자의 손에 잡히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관측령을 자신에게 보낸 것이 그녀 스스로 의지인지 아니면 자신을 유인하기 위한 조직의 함정인지는 모르지만 그녀가 위험하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툭툭.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가 불안한 마음을 태웠다. 그녀의 관측령이 물을 매개로 하는 만큼 오히려 관측령의 활동범위가 높아졌음에 안도해야 하는 게 정상이지만 한 번 어긋난 마음은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There isn't day I don't think about it
    There isn't day I don't think about it

    迷う心が君にとどくように
    헤매는 마음이 그대에게 닿도록



순간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파란 불꽃이 일어나며 전기가 충돌했다. 전격 능력을 가진 계약자일까. 돌(Doll)을 잡으려는 방법치고는 상당히 과한 행동이었다. 설마 죽이려는 것인가. 헤이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적에게 잡혔다는 이유로 이미 한 번 인을 죽이려 했던 '조직'이다. 하물며 배신한 돌(Doll) 따위에 연연할 만큼 너그러운 곳이 절대로 아니다. 어떻게 돌아가는지 확인할 길 없는 상황에 헤이는 급히 와이어를 꺼냈다.

빠르게 움직이던 관측령이 도착한 곳은 외곽지대에 있는 작은 공원이었다. 공원은 한밤에 내리는 스산한 비로 어둠이 더욱 깊어져 음산한 기운까지 풍겨냈다. 좁고 어두운 공간이기에 헤이가 와이어를 이용해 인을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그는 하다못해 손수 뛰어다니며 구석구석을 뒤졌고, 그 사이 몸은 한껏 비에 젖었다. 간신히 그녀를 찾아냈을 땐 한기가 스며들어 손끝이 얼얼할 만큼 시렸다.


この月明かりの下で 私の名前を呼んで
    이 달빛 아래에서 나의 이름을 불러주세요

    たしかに逢いに行くよどこへでも君のそばに...
    꼭 만나러 갈게요, 어디라도 그대 곁으로...



" 헤이..... "

헉헉대는 숨소리에 인이 나무 기둥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젖어서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머리카락, 어디서 긁혔는지 팔에 생긴 작은 상처들, 흙탕물이라도 튀었는지 얼룩진 치마. 그녀는 물에 빠진 생쥐보다 더한 몰골이었다. 마치 도망치기에 숨 가빴던 자신의 상황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러나 인의 눈동자만큼은 빛을 잃지 않고 헤이를 똑바로 향했다. 이젠 돌(Doll)이라 부르기엔 너무도 선명한 감정 앞에 헤이는 자신도 모르게 주머니로 손을 넣어 무언가를 찾았다.

" ............. 헤이? "

보이지는 않지만 감각으로 헤이의 이상 행동을 알게 된 인이 고개를 살포시 들었다. 볼품없는 인의 머리카락 사이에 단정히 꽂힌 자줏빛 머리핀. 인의 눈동자에 머무는 생기까지는 표현하지 못해도 색깔만큼은 흡사했다. 마치 그녀의 눈동자를 직접 보기라도 했다는 듯이. 헤이는 그제야 왜 자신이 이 머리핀을 그녀에게 주고 싶어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 뭐 하는 짓인지 괜스레 저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자신답지 않은 행동의 결과물이 나쁘지는 않았다.


この月明かり瞬きひとつせず
    이 달빛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静かに私を見つめていた
    고요히 나를 바라보고 있어요

    君との未来をさがしてたこの光の中に...
    그대와의 미래를 찾고 있었어요 이 빛 속에서...



언제나처럼 흔적이 남지 않도록 지체해서는 안 되었는데 한 자리에 너무 오랫동안 머물렀다. 이곳에서의 생활이 좋았던 것일까. 아니, 딱히 좋을 것도 그렇다고 싫었던 것도 아니다. 단지 보통의 사람이 누릴 평범한 일상에 젖어버렸다는, 처지를 망각한 채 분에 넘치는 사치를 누렸을 뿐이다. 이제 막 깨달은 씁쓸한 꿈- 냉혹한 현실은 그렇게 꿈을 일깨우고선 그 여운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꿈은 다시 꾸면 될 것이다. 설사 아무리 바란들 또다시 깨질 허무함이라 하더라도.

꿈은, 그러기에 '꿈'이라 이름 붙여진 것일 테니까ㅡ.

" ....... 가자...... 인.... "

헤이는 나직이 인에게 속삭이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언제부턴가 마주 잡은 작은 손, 그 안에 담긴 놓쳐서는 안 될 무언가를 함께 거머쥐었다. 그때까지 헤이를 바라보고만 있던 인은 잠시 얼굴에 서렸던 의문을 지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그 단어 하나에 담긴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이기에 더는 말이 필요가 없었다.

두 사람이 공원을 빠져나가는 사이, 조금씩 빗줄기가 가늘어졌다. 찬 공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어왔다. 뜻하지 않은 불청객을 맞이했던 공원은 헤이와 인이 남겨놓은 발걸음 소리를 품은 채 아스라이 멀어지는 그들을 배웅했다. 두 번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두 사람을 그리며 안타깝도록.


by 아르튀르 | fanfic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