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ㅡ사건발생 2일 전.




으슬으슬, 몸이 시리게 떨렸다. 콜록, 기침이 간헐적으로 튀어나왔다. 꽉 잠긴 목도 한기를 가득 품은 듯 따끔거리기만 했다. 정인은 시트에서 얼굴만 빼내 시선을 들었다. 오전 9시 30분. 아침밥도 거르고 침대에 틀어박혀 있었건만, 반갑지 않은 감기가 제 존재를 끊임없이 드러내는 통에 잠이 저만치 도망가버렸다. 어제부터 몸 상태가 이상하긴 했다. 사실 감기 기운이야 이미 달고 있은 지 오래지만ㅡ그 바람에 무기한 휴가라는 황당무계한 팀장의 명령을 받아야만 했지만ㅡ신경 쓸만한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은 틀림이 없는 걸까. 이 말 같지도 않은 휴가를 받은 이래 점점 몸 상태가 나빠지더니 기어이 몸살감기로 앓아눕고 만 것이다.

" 정말.. 민 검사님은 왜 휴가 따위를 줘서는.. 사람을 이 모양 이 꼴로 만드는 거야. "

몸이 편해도 마음이 불편하면 결국 이상증세가 오게 마련이다. 그럴 때는 낫던 병도 도지는 법이다. 민태연, 이게 다 당신 탓이야. 정인은 한창 바쁠 시기에 억지로 휴가를 받아서 원치 않게 쉬게 된 만큼 모든 원망을 태연에게 돌렸다.

" .. 손해배상 청구할 거야.. 왕창.. "

정인은 흐느적거리는 몸을 이끌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에고고. 노인네 같은 한숨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정말 어지간히 몸이 따라주지 않는지 욕실로 향하는 정인의 걸음은 더디기만 했다. 간단히 끝낼 샤워도 거북이와 달팽이가 경주를 하듯 느릿느릿, 한참 후에야 푹 익은 상태로 모습을 드러낸 그녀였다. 허물을 벗어 놓은 듯한 침대를 정리하고 간단한 식사를 끝낸 다음 나갈 채비를 모두 마칠 때까지, 점심시간은 이미 지척에 다가온 후였다.

『 유 검사님, 뭐하세요? 』

하루가 멀다고 지겹게 들었던 목소리건만, 휴가라는 명목 아래 쉬게 된 후로는 처음으로 듣게 된, 어쩐지 그 음색이 반갑기까지 하는 동만이였다. 정인은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얼마쯤은 웃긴 듯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쉬긴 어지간히 쉬었나 보다. 아니면 아파서 제정신이 아니거나.

" 최동만,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웬 전화질이야? "

『 유 검사님 걱정돼서 전화한 거죠. 그런데, 어? 목소리가 이상한데요? 설마하니 감기? 』

" 설마하니 감기가 맞다. 어쩔래? "

『 민 검사님 선경지명이 대단하시다. 우리 유 검사님 감기 심해지실 줄 어떻게 알고선 요래 딱 휴가를 주셨대요? 네? 』

" 선경지명이 다 얼어죽었냐? 무슨.. 야, 목 아파. 말 시키지 마. "

휴가랍시고 냅다 던져주고선 사건소식은커녕 안부전화 한 통 없이 입 싹 닦아버린 왕싸가지 상관님에 관해서는 더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잘 먹고 살 살라지. 하지만 유정인 사전에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하는 법.

" 손해배상 청구할 테니까, 준비하고 있으라고 전해. "

누구에게 전하라는 말인지 대번에 눈치챈 듯 동만이의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알았어요. 병원이나 빨리 가세요. 동만의 당부를 끝으로 통화를 끝낸 정인은 외출을 서둘렀다. 차를 운전할까 하다가 그만두고 버스를 이용했다. 평일 낮임에도 버스 안은 뜻밖에 승객들로 붐볐다. 그러나 오랜만의 버스는 그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햇살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했다. 거리는 이미 한낮의 열기로 가득했다. 깜박깜박, 저 멀리 보이는 신호등은 오늘따라 여유가 넘쳤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다 평화롭기만 했다.

ㅡ진짜.. 휴가구나. 나, 정말 쉬는 거야.

번쩍, 정인의 눈이 떠졌다. 세상에 언제 잠이 들었을까. 이미 목적지는 한참이나 지난 후였다. 정인은 황급히 다음 정거장에서 내렸다. 벌써 2시가 훌쩍 지나버렸다. 집 근처 가까운 병원에 가려고 했었는데, 그곳으로 가려면 한참을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돈도 시간도 낭비, 무엇보다 몸이 천근만근인지라 도저히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여기서 가까운 데로 가자. 정인은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병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 .. 유정인 씨, 어디가 아프시죠? "

정인은 접수한 지 오래지 않아서 금세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대형병원임에도 이리 빨리 제 순서가 왔다는 게 놀라울 법도 하건만, 이미 주의력이 바닥인 그녀로서는 빨리 치료받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쁠 따름이었다. 의사가 묻는 말에 곧잘 대답하는 모양새가 말 잘 듣는 어린이와 같았다. 하지만 사실 정인은 의사의 말은 이미 귓등으로 흘리고 있었다. 그저 빨리 주사나 좀 놔줬으면.. 하는 게 그녀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런 정인의 마음을 읽었을까.

" 먼저 '주사'부터 놔드려야겠네요. "

처음부터 친절했던 의사는 끝까지 친절했다. 절실히 반가운 그 말에 정인은 실없이 웃고 말았다. 하지만 그래서 알지 못했다. 그 친절한 의사가 말하는 '주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ㅡ.


2.


ㅡ사건발생 다음날, 현재.




" 어이, 최동만. 그래서 범인은? 범인은 누구야? "

순범은 채 자리에 앉기도 전에 다짜고짜 동만을 다그쳤다. 범인의 전화를 받은 데다가 그 직후 태연의 태도가 너무도 절박했기에 마음의 여유 같은 건 사라진 지 이미 오래였다. 범인만 알아낸다면 지금 당장 쳐들어가서 족치고 싶은 심정이랄까. 사실 태연도 지금 말은 안 하지만 비단 자신과 같은 마음일 것이다. 그런데, 범인에 앞서서 동만이를 먼저 족쳐야 했던 걸까.

" ..... 모릅니다. "

순간 제 귀가 잘못된 게 아닌가, 순범은 의심이 들었다. 사건에 너무 몰입해서 헛소리가 다 들리는지도 모르겠다. 방금 모른다고 말한 거 아니지? 그러나 되묻는 그 말에 돌아온 건, 맞는데요? 지극히 태평한 긍정.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너무도 당당하게 대답하는 동만이였다. 이 썩을 놈이. 확 솟구치는 열에 순범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지껄이는 거야? 너 아까 뭐라고 그랬어? 기대하라고 큰소리 뻥뻥 쳤잖아? 꽁지가 불이 나도록 달려오라고 그랬어, 안 그랬어? 그런데 대뜸 모른다고? 너 지금 누굴 놀려? "

" 황 형사님.. 진정 좀 하시고.. "

"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야, 인마, 지금 누구 목숨이 걸린 일인 줄 알고 고따위 말 같지 않은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응?? 유 검사라고 유 검사-!! 언제 어떻게 죽을지도 모르는 아주 급박한 상황이란 말이야! 근데 그런 말이 나와? "

" 아, 그러니까 황 형사님.. "

" 오냐. 그래.. 동만이 네가 오늘 내 손에 콱 죽어봐야 정신을 차리지.. "

" .. 이 사람이 범인입니다-!! "

양 소매를 싹싹 걷어서 제대로 손을 날리는 순범의 모양새에 동만은 노트북을 다다닥 두드리더니 재빨리 앞으로 들이밀었다. 뭐? 범인이라는 소리에 귀가 번쩍한 순범은 동만의 뒤통수는 물론 앞통수도 멋지게 갈겨주려던 행동을 멈추고 노트북 속 사진에 시선을 집중했다. 남자였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 있는 집에서 제대로 자랐을 법한 수려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 이름 제정현. 나이 36세. 직업은 의사, 현재 세브란스 병원에 근무 중입니다. "

외모만큼 직업도 화려하시구먼. 그런데 뭐야? 너 아까는 범인 모른다며? 순범의 눈매가 동만을 마구 찔러댔다. 멋쩍은 듯 동만이 헛웃음을 삼켰다. 슬슬 태연의 눈치도 보는 게 조금, 아니 많이 찔리긴 한 모양이었다.

" 그게, 표정들을 보니 너무 긴장하신 것 같아서.. 슬로우, 슬로우.. 릴렉스 하자는 의미에서.. 아하하하.. "

" 이놈이... 지금 웃음이 나와? 갖고 노니까 웃음이 나와? "

" 갖고 놀다니요? 천부당만부당 하신 말씀. 사실 따지자면 진짜 범인이 누군지 몰랐어요. 애인, 숨은 혈육, 스토커.. 별별 가능성을 갖고서 그렇게 윤현수 주변을 뒤져도 안 나오더라고요. 웬만하면 걸리기 마련인데.. 비밀 연애를 잘한 건지 어떤지.. 글쎄, 가장 가까웠다던 친구들도 제정현이 뭐하는 사람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알지 못하더라고요. 그나마 성씨라도 알고 있는 게 다행이었다니까요. "

증거를 남기지 않는 치밀함과 윤현수 주변에 처음부터 남아 있지 않은 존재감까지. 이 사건의 전 담당형사가 범인의 꼬리를 잡지도 못하고 살해당한 것은 결코 무리도 아니었다.

" 그래서 그동안의 유 검사님 행적을 좇아서 유력한 범인을 찾아봤어요. "

인턴사원 딱지를 아직도 못 뗀 주제에 이제는 요령이 붙은 건지 아니면 정인의 목숨이 달린 일이라서 형사흉내까지 내고 만 건지, 동만은 지금까지 나온 사건 관련 자료에 자신이 부지런히 끌어모은 정보를 종합해서 범인을 색출한 모양이었다. 이 정도까지 해냈다면 응당 칭찬세례를 받아도 무방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인 만큼 범인 검거가 먼저였다.

" 황 형은 병원으로 가 봐. 난 집으로 가볼게. "

" 알았어. "

" 최동만, 넌 그 외 범인이 갈 만한 장소를 계속 알아봐. "

" 알겠습니다. "

태연과 순범, 그리고 동만은 제각각 맡은 임무를 따라 빠르게 흩어졌다. 범인에게 한발 더 가까이 다가선 지금, 그들은 어느 때보다 바쁘게 움직였다.


3.


ㅡ사건발생 하루 전.




안개에 갇힌 듯 시야가 흐릿했다. 머릿속은 꿈속에서 헤매는 듯 몽롱했다. 근육이 마비됐는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정인은 제 몸인데도 제 것 같지 않은 부유감을 느끼며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외따로 노는 몸처럼 정신도 쉽사리 그녀의 말을 들어주지는 않았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보이는 그 무엇. 가까운 듯 먼, 혹은 먼 듯 가까운 뭔가가 제멋대로 다가왔다가 멀어져 가기를 반복했다.

" .. 이런.. 정신이 들었네? "

시선을 맞추는 남자의 눈동자는 목소리만큼이나 나긋했다. 어쩌면 흐릿한 시야가 착각을 불러일으킨 지도 모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눈앞의 남자에게선 살기가 느껴지지 않다는 점이었다. 이건 어린 시절부터 어둠의 세계를 접한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본능과도 같았다.

" 여기.. 어디에요? 나.. 어떻게 된 거죠? "

" 잠시 정신을 잃었던 것뿐이야. 여긴 내 집이야, 걱정하지 마. 그냥 계속 누워 있어. "

" .. 내가, 정신을.. 잃었다고요? "

모르겠다. 이해할 수가 없다. 왜 자신이 정신을 잃었다는 건지, 정인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보려고 해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아니, 뭔가 흩어진 기억들이 존재하지만, 조각난 퍼즐을 맞출 여력이 없었다. 뿌연 세상에 덩그러니 혼자 놓인 기분. 마치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제 기억을 깨뜨린 것만 같았다.

" .. 근데, 누구세요? "

" 그런 건 신경 쓸 필요 없어. 모르는 게 더 좋아. "

" 무슨.. 뜻이죠? "

남자는 웃었다. 사심 없이, 아주 순수하게. 정인은 분명히 그렇게 느꼈다. 말을 많이 하면 몸에 안 좋아. 남자는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그의 손길은 부드러웠다.

" 너.. 우리 현수랑 많이 닮았어.. 아주, 예뻐. "

" 현수? 그 사람은, 누구예요? "

" 내 소중한 사람. 아주 아주 사랑스러운 여자.. 있어, 그런 여자가... "

" 지금은.. 곁에 없어요? "

정인의 그 한마디에 남자의 입매가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너, 감이 아주 좋구나. 역시 그놈의 여자야. 남자가 얼굴을 가까이 마주 댔다. 초점이 점점 선명하게 변하는 정인의 눈동자에 남자의 눈이 와 닿았다. 날카롭다. 차갑다. 서늘하다. 조금 전까지의 나긋한 목소리, 부드러운 손길, 남자가 내보이던 친밀감이 모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욱씬. 심장이 아프다. 왜일까? 이 남자, 누군가와 닮았다. 아주 많이.

" 너는 아무것도 모르겠지. 너한테는 죄가 없을 거야. 넌 우리 현수랑 같으니까. 하지만 그놈을 고통스럽게 만들려면 네가 있어야 해. 너를 괴롭혀야 그놈이 죽을 만치 괴로워해. 내가 겪어봐서 그건 잘 알지.. "

남자의 눈동자에 조금씩 광기가 어렸다. 웃는 듯 우는 듯 그의 입매가 올라갔다. 이대로 너를 죽여버리면 그놈은 덜 아프겠지? 정인의 목을 조르는 흉내를 내던 남자가 손에 힘을 주었다. 정인의 얼굴이 굳어버렸다. 비명 같은 건 나올 새가 없었다.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몸은 저항은 애초에 포기한 채 그대로 숨이 넘어갈 뿐이었다. 콜록콜록. 남자가 손을 풀자 거친 숨이 몰아쳤다.

" 그래.. 그건 너무 쉽지. 아직은 때가 아니야. 최대한 고통스럽게, 처절하게 만들어 줄게. 그러니까, 지금은 편히 쉬어. "

남자가 정인의 팔에 주사를 놓았다. 이미 몇 차례 주사를 놓았던지 그녀의 하얀 팔에는 작은 바늘 자국이 군데군데 보였다. 싫어. 하지 마. 정인이 거부의 몸짓을 내보였다. 괜찮아. 그냥 자는 것뿐이야. 남자는 정인을 다독이듯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곧 정인의 눈꺼풀이 조금씩, 천천히 내려앉았다. 감기는 눈만큼 마음도 흩어지기 시작했다.

" 이다음에 민태연이 널 만날 때는, 넌 세상에서 가장 예쁜 모습일 거야. 그놈이 죽어도 잊을 수 없게끔. "

희뿌연 세상이 정인을 삼키는 그 순간, 남자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타고 그녀의 귓가에 내려앉는 마지막 말은 더없이 아름답고, 더없이 잔인했다.


4.


ㅡ사건발생 다음날, 현재.




" 안, 나왔다.. 고요? "

순범은 순간 뒷머리가 땅기고 혈압이 올라가는 기분이 들었다. 병원에 도착할 때만 해도 드디어 범인의 꼬리를 잡을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에 잡으면 어떻게 요리할지 정말 흥이 났을 지경인데, 간호사의 한마디는 순범의 그런 기대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말았다. 이 여자, 여자 최동만일지도. 왠지 뒤통수 한 대 휘갈기고 싶어진다. 이런 우라질. 어쩐지 일이 쉽게 풀린다 했다. 지금껏 꼬투리 하나 잡히지 않았던, 아예 우릴 가지고 놀던 범인이 너무 쉽게 걸린다 했다. 자, 침착하자, 황순범. 유 검사의 목숨이 달린 일이다.

" 정확히, 언제부터 안 나왔는데요? "

" 결근하신 지 벌써 3일째에요. 전화도 안 받으시고, 계속 연락이 되지 않으세요. "

" 그 이유는 전혀 모르고요? "

" 아무 말씀도 없으셨어요. 그래서 다들 의아해하고 있어요. 사실 그분이 정말 예의 바른 분이거든요. 윗사람은 물론 아랫사람들에게도 존댓말을 써가며 아주 친절하시고. 환자들에겐 또 얼마나 잘해주시는데요. 시간약속도 어긴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훈훈한 외모와 어울리게 정말 성격까지 좋다니까요. 그런 분이 미혼이라니 진짜 이건 축복이에요.... "

간호사는 점점 자신만의 세계에 빠지는 듯 엉뚱한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젊은 의사가 잘생긴 외모에 성격까지 좋다니 미혼 여성에겐 보는 것만으로도 더없이 달콤하겠지만, 그 훈훈한 외모의 성격 좋은 의사가 사실은 잔인하게 다섯 사람을 살해한 연쇄살인마라는 사실을 안다면 이 간호사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퍽 재미있을 것 같다. 아, 그렇군요. 젊은 분이 대단하네요. 그런데.. 순범은 기분 상하지 않게 맞장구를 쳐주고선 슬쩍 말머리를 돌렸다.

" .. 뭐, 짐작 가는 일은 없나요? 평소와 뭔가가 달랐다던가.. 아주 사소한 거라도 좋은데.. "

" 딱히 이상한 건 없었어요. 워낙 평판이 좋은 분이라서.. 그런데.. 그날은 좀.. 사실 아주 없는 일은 아니지만, 그분한테는.. 상당히 의아하긴 했죠. 분명히.. "

간호사는 뭔가 짐작 가는 게 있는 듯 고개를 끄덕여가며 긍정의 의사를 표했다. 그녀의 말은 이러했다. 결근하기 전날, 그날 오후에는 예약 환자로 시간이 다 차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미예약자인 여성 환자를 손수 진료하더니 그 이후 모든 예약을 취소하고 바로 퇴근했다고. 일절 어떤 말도 남기지 않고 무작정 나가버렸다는데,

" 그분의 평소 모습을 생각하면,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지 그녀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미예약자인 여성 환자. 순범은 두말할 것 없이 정인을 떠올렸다. 감기몸살로 하필 범인이 근무하는 병원을 찾은 정인. 제아무리 치밀한 범인이라도 이것만은 의도하지 못했을 터. 우연이라면 너무도 얄궂고, 필연이라면 젠장하게 미칠. 그러나 범인의 입장에선 다시 없을 행운. 병원에서 뜻하지 않게 그녀를 발견한 범인은 얼마나 흥분했을까. 스스로 덫 안으로 들어온 정인을 보면서 얼마나 희열을 느꼈을까. 범인은 그 순간 납치 계획을 수정, 진료를 핑계로 정인을 제 손아귀로 끌어들이고선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을 것이다.

" ... 의사씩이나 되는 작자니 수면제나 마취제를 구하는 건 일도 아니겠지. 젠장맞을.. 유 검사, 너도 어지간히 운도 없다. 하고많은 병원 중에 왜 하필 여기냐.. 여기가.. "

오랫동안 정인의 뒤를 캐고 다닌 범인을 본다면 정인의 납치는 시간상의 문제일 뿐 언제가 됐든 곧 터질 일이지만, 순범은 그전에 제 발로 범인을 찾아간 정인이 야속하기만 했다. 물론 그런 식으로 따지고 든다면 애초에 그녀에게 휴가 따위를 준 태연이 문제지만. 병원을 나선 순범이 곧바로 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 어, 황 형. 어떻게 됐어? 』

" 허탕쳤어. 벌써 날라버리고 없어. "

『 ... 없어? 』

" 간호사 말로는 3일 전부터 결근이라고 하네? 정확하게는.. 왜 그날, 동만이가 유 검사에게 전화했다던 그날 말이야.. 범인이 사실 오후 진료는 전부 예약 환자였다는데, 글쎄 뜬금없이 유 검사를 제 놈이 진료했다네? 그리고는 갑자기 예약 모두 취소하고 나가버렸는데, 그 후로 지금껏 깜깜무소식... 이놈, 아무래도 유 검사 납치해서 바로 뜬 모양이야. "

『 연락도 안 되고? 』

" 작정하고 사라진 놈인데 연락이 될 리가 없지. 그쪽은 어때? "

『 지금 막 도착했어. 』

" 나도 곧 그쪽으로 갈게. 그럴 일은 없겠지만, 위험한 일은 벌이지 마라, 민 검.  "

병원에서 사라진 놈이 제 은신처에 계속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만약의 경우란 것이 있었다. 그 경우가 하필 최악의 상황이란 게 문제라면 문제일 뿐. 정인을 인질로 삼은 범인과의 대치. 태연이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나마 나을까. 범인이 보낸 사진에서 본 정인의 상처투성이 모습만으로도 다분히 충격이었다. 그때로부터 시간이 더 흐른 지금, 현재 정인의 몸에 또 다른 상처들이 생겨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런데 만약 그런 모습을 태연이 본다면? 범인에게 인질로 붙잡힌 피투성이 그녀를 만난다면? 순범은 저도 모르게 치를 떨었다. 상상하기조차 겁이 나는 상황이다. 사실 정인을 위한다면 그런 식으로라도 마주쳐서 그녀를 한시바삐 구해내야겠지만, 솔직한 심정은 이대로 범인을 놓쳐도 좋으니 제발 그놈이 거기에 없기를 빌 따름이다.

" 이봐, 의사 선생. 살아서 내 손에 잡히고 싶다면, 죽을 힘을 다해서 도망치라고. "

형사의 입장을 망각한 순범의 애타는 바람을 범인이 들었을까. 태연이 도착한 범인의 은신처는 인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현기증이 날 만큼 지독하게 피 냄새만이 자욱했다. 놈에게 너무도 잘 어울리는 살인의 향기였다. 태연은 범인의 집을 둘러보았다. 혼자 살기에는 휑하다 싶을 정도로 넓기만 한 집은 마치 결벽증이 묻어나올 듯 흰색으로 점칠되어 있었다. 그나마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선반 곳곳에 놓여 있는 게 인간적인 향이 난다고 할까. 하지만 그마저도 범인의 물건은 아닌 듯 굉장히 이질적이었다. 거실 한편을 차지한 사진, 그 속의 한 여자. 윤현수. 모르긴 몰라도 생전 그녀가 손수 사들인 물건일 것이다. 그녀의 손때가 묻은 것들. 아무리 사소하다고 해도 범인에게는 무엇도 버릴 수 없는 소중한 의미가 되었을 터. 마치, 자신이 연지의 물건 그 어느 하나도 버리지 못하는 것처럼.

" 정말.. 지독하게 닮았구나, 제정현. "

씁쓸한 자조에 태연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제 숨은 모습을 타인에게서 본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지독하다. 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정인을 납치한 범인에게서라니. 죽여버리고 싶다가도 그 감정에 동조하고, 또한 동조하는 만큼 죽여버리고 싶은 이율배반이 수시로 제 안을 휘젓고 다닌다. 그놈을 만난다면 정말 무슨 짓을 저지를지, 지금으로서는 전혀 상상조차 할 수가 없다.

" ............................................. "

피의 향이 짙어졌다. 한 걸음 한 걸음, 점점 다가갈수록 뇌리를 콕콕 찔러댔다. 누군가 피를 흘리기라도 하는 걸까. 자욱한 선혈 속에서도 선명하게 돋아나는 향기는 태연의 피부밑으로 스며들어 그 발길을 끌어당겼다. 설마, 아니겠지. 유정인, 넌 아닐 거다. 본능처럼 울리는 붉은 신호를 애써 무시하지만, 태연의 감각은 팽팽하게 곤두선 상태였다. 걸음이 빨라졌다. 그만큼 호흡도 가빠졌다. 날카로운 눈매 사이로 눈동자가 푸르게 빛이 났다.

ㅡ시체였다. 피로 뒤덮인. 그리고... 남자.

다섯 번째 희생자 민진현.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시체가 누구인지는 알만했다. 황 형, 다섯 번째 희생자 찾았어. 태연은 순범에게 전화를 거는 와중에도 시체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선명하게 그어진 목, 잘게 찢어진 복부, 절단된 혀와 손목. 희생자 네 명과 일치했다. 사후경직반응 역시 이미 나타났다. 그런데 시체에는 아직 굳지 않은 피가 잔뜩 묻어 있다. 어떻게 된 거지? 태연의 눈이 위험하게 번뜩였다.

『 유 검사는 없는 거야? 』

" ... 아직, 모르겠어. 그런데.. 없는 것 같아. "

붉은 선혈이 시체를 비켜 바닥에 흩뿌려져 있다. 방울진 길은 바닥을 건너 침대로 이어진다. 찢긴 사진들이 어지럽게 놓인 그곳. 머릿속에 범인이 보낸 정인의 사진이 불시에 떠올랐다. 타는 선혈의 침대, 그 위에 죽은 듯 누워 있던 그녀. 찢긴 사진들 사이로 정인의 모습이 겹쳐졌다가 사라졌다.

『 젠장. 또 어디로 끌고 간 거야-! 내가 저놈더러 도망가랬지 유 검사까지 데리고 가랬냐고. 아주 사람 피를 말리려고 작정한 놈이야. 』

" .................................. "

자신을 향해 울부짖었던 범인. 그가 또다시 칼을 휘두른다. 마치 분풀이를 하듯 정인을 난도질한다. 피가 바닥으로 쏟아진다. 튕기는 피는 시체를 덮는다.

『 대체 그놈은 너한테 무슨 원한이 있다고 이따위 짓을 하는 거야?! 민 검, 너 뭐 아는 거 있냐? 짐작 가는 거라도 없어? 』

" ... 7년 전 그날... 이라고 했어, 범인이.. "

『 뭐? 7년 전 그날? 그게 뭔데? 어, 가만.. 7년 전이라면.. 네 여동생.. 』

순범도 불식 간에 떠오른 듯 연지를 거론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7년 전,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그 사건. 연지를 제게서 뺏어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뱀파이어 사건이 7년 전의 일이었다. 우연의 일치일까. 범인도 7년 전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미친 듯 증오하고 있다. 피가 술렁거린다. 목이 탄다. 도대체 뭘까? 이 소리 없는 불안의 정체는.


『 살아가는 시간이 다르기에,

    홀로 견딜 수밖에 없는 어둠의 고통.

    당신은 잘 알겠지, 민태연? 』


본시 '민태연'과 '유정인'이 나란히 찍혔을 사진들. 그러나 침대 위를 메운 사진들은 반으로 찢겨 제각각 떨어진 상태다. 마치 '민태연'과 '유정인'은 함께할 수 없는 사이라는 걸 증명하듯이, 그걸 범인 역시 안다고 말하듯이. 놈이 보낸 메시지가 섬광처럼 심장을 관통한다. 술렁이던 피가 차갑게 식는다.

" .. 황 형.. 범인의 정보가 필요해. 7년 전의.. 행적에 관해서.. "

ㅡ놈이 세상을 미워하는 만큼 '민태연'을 증오할 수밖에 없는 이유.

『 ............. 태연아... 』

ㅡ놈이 고통받았던 만큼 '민태연'도 똑같아지기를 바라는 이유.

" .. 그놈은.. 제정현은.. 연지를 알아... "

죽은 줄 알았던 여동생이 돌아왔다. 피를 탐하는 본능만이 도사리는 짐승이 되어서 제 눈앞에 나타났다. 뱀파이어가 되는 길은 두 가지. 뱀파이어의 첫 희생자가 되거나 뱀파이어의 피를 수혈받거나. 뱀파이어로 눈을 뜬 동생이 얼마나 많은 피를 탐했던가. 소리 없이 사라진 목숨이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제정현은 살아 있다. 살아서, 7년 전 '그날'을 저주하고 있다.

『 ... '그날'이었어.. 7년 전 '그날'.. 바로 '그날'에, 내 삶이 끝났어. 알아? '그날' 이후로 평온한 내 삶이.. 우리 현수가...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다고-!! 그저 거기 있었던 것뿐인데-!! 이유도 없이, 나를 짓밟았어-! 내게서 현수를 뺏어갔어-! 왜 나였는데-!! 그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나였냐고-!! 왜---!! 』

그의 복수ㅡ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by 아르튀르 | fanfic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