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싸늘한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밤을 꼬박 새웠는지 태연의 얼굴은 더 파리해 보였다. 지그시 감은 눈은 미동조차 없었다. 순범은 조금 전 태연이 읽었던 자료를 훑어내렸다. 차츰 낯빛이 변해가는 게 태연의 반응과 다르지 않았다. 동만은 그런 둘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간밤, 순범이 요구한 범인의 7년 전 행적을 조사해서 내놓은 게 10분 전이었다. 왜 7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갔는지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태연의 지시라는 순범의 말에 군말 없이 정보를 긁어모았다. 그런데 도대체 7년 전 범인의 무엇이 문제였을까. 태연과 순범의 반응은 무서울 정도로 조용했다.

" ... 최동만. 이 자료, 이거 정확한 거 맞냐? "

" ... 맞는.. 데요?... 왜.. 요?.. 뭐, 잘못.. 됐어요? "

경직된 얼굴, 높낮이가 없는 음성. 다른 의미로 험악한 순범이기에 동만은 흠칫 목소리가 떨렸다. 평소처럼 손부터 나가고 언성을 높이는 게 마음 편하지, 대답에 물음이 자꾸만 그려지는 건 동만도 어쩔 수가 없었다.

" 차라리 잘못된 게 낫지. 이건.. "

순범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하필. 하.. 진짜. 꼬여도 더럽게 꼬였네. 이거 어디서 어떻게 풀어야 하는 거야.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이 두서없이 마구 튀어나왔다. 그러니까 시작은 연지로부터.. 순범이 입을 닫았다. 곧 시선이 동만을 향했다. 잠시 나가 있어. 순범의 고갯짓이 말하는 바는 분명히 그러했다. 동만은 두말없이 자리를 떴다. 평소였다면 궁금증 때문에라도 버텼을지도 모르지만, 오늘 같은 분위기는 결코 사양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동만이 사라지자 순범은 그제야 시원스레 속을 털어놓았다.

" 내 기억이 틀림없다면, 7년 전 그때.. 이놈이 일하던 곳이 연지의 시신이 안치됐던 그곳이란 거잖아. 장 부장이 그랬다며? 뱀파이어가 되는 방법은 첫 희생자가 되거나 피를 수혈받거나, 둘 중 하나라고. 그럼 이놈은.. 하, 거참. "

따지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제정현'은 뱀파이어로 눈을 뜬 '이연지'의 첫 희생자였다. 어린 나이에 뱀파이어가 된 탓에 피의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는 그녀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터, 그 후 자신이 더는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에 얼마나 절망했을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윤현수'와 멀어진 계기도 비단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건 태연이 정인을 대하는 태도만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다.

" 결국 이놈은 자기를 뱀파이어로 만든 연지를 대신해서 널 죽이고 싶어한다는 거잖아? 네가 걔 오빠니까! "

연지가 장 부장과 함께 사라진 이후, 한동안 세상이 떠들썩했다. 다시 재연된 뱀파이어 사건, 그 이목이 오죽했던가. 지금은 그런 일이 애초에 없었다는 듯 다들 잊다시피 했지만, 당시에는 수사본부가 마비될 정도로 타격이 컸다. 아마도 놈은 그때 알았을 것이다. 자신을 그렇게 만든 사람이 누구며, 그 애의 오빠가 태연이라는 사실을.

" ... 죽이고 싶은 사람을 만났으니, 아주 기뻐서 춤이라도 췄겠네. "

입안이 텁텁했다. 쓰디쓴 신물이 올라왔다. 시작부터 석연치 않은 사건이더니, 갈수록 오리무중 첩첩산중의 연속이다. 순범은 헛웃음을 삼켰다. 이제 어쩔 거냐? 많은 뜻이 함축된 물음. 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은 연지로 복잡했다. 가슴속은 정인으로 들어찼다. 체증이 온 것처럼 사방이 숨 막혔다. 검사 '민태연' 이전의 두 마음이 어지럽게 휘돌았다. 하지만 그런 태연을 비웃듯 '제정현'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2.


취조실에 홀로 앉아 있는 남자는 아주 편안해 보였다. 겁에 질렸다든가 두려움에 떤다든가 하는 모습은커녕 하다못해 긴장한 기색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툭-툭-. 왼손으로 턱을 받치고 오른손은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선 손가락을 튕기는 것이 무료한 시간을 어찌 보낼까 궁리하는 사람과도 같았다. 마치 제집에 있는 것처럼 익숙하고 여유가 넘치는 모습.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이 광경을 본다면 어느 누가 그를 범인이라고 여길까. 남자는 제 발로 여기를 찾아온 사람답게 여느 범인이나 용의자가 취하는 행동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 저건 간땡이가 부은 건지.. 원래 겁대가리가 없는 건지.. 완전 천하태평이네.. "

취조실 뒤편에서 태연과 함께 남자를 지켜보던 순범이 혀를 내둘렀다. 형사생활 20년 동안 별의별 범인을 만나봤지만, 저 남자 같은 경우는 처음이었다. 물론 개중에는 확연한 증거 앞에서도 얼굴에 철판을 깔고 딱 잡아떼거나 시종일관 웃음으로 때우는 뇌 구조가 이상한 놈들도 있었다지만, 저 남자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연쇄살인범한테 기본상식을 논한다는 것도 웃기지만, 무릇 범인이라 하면 범행 사실을 숨기고 도망가는 것이 기본 아닌가. 그런데 저 남자는 치밀한 연쇄 살인을 뒤로한 채 제 발로 나타난 것은 물론 저를 심문할 검사를 기다리는 시간을 유유자적 즐기고 있다. 드디어 세상에 망조가 들었을까.

" 범행신고전화를 하지 않나.. 현장사진을 찍어서 갖다 주지를 않나.. 그러다 결국은 제 발로 찾아오지를 않나.. 야~ 살다 살다 저런 놈은 진짜 처음이다.. "

" ....................................... "

" 민 검, 저놈 저거 만만치 않겠는데 혼자서 괜찮겠냐? "

" ....................................... "

" .. 민 검사? 어이.. 민태연? "

부름에 답이 없는 태연이 이상했는지 순범이 힐끗 시선을 들었다. 야무지게 닫힌 태연의 입은 어떤 말도 하고 있지 않았다. 팔짱을 낀 채 미동 없는 자세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눈동자만은 오롯이 다른 뜻을 품고 있었다. 범인을 향한 서슬 퍼런 칼날, 그 속에 담긴 숨은 진심. 검사로서 범인을 검거하려는 강한 의지, 그 너머로 보이는 누군가를 향한 마음. 말 한마디가 없어도 절절한 구슬픔이다. 쓰라린 애틋함이다. 지금껏 다치고 헤진 가슴이 이번 사건으로 또 얼마나 피투성이가 되었을지는 감히 짐작하고도 남음이다.

" 민태연의 전매특허가 합법적으로 협박하는 거잖아. 저놈이라고 뭐 다르겠냐? 나는 못 믿어도 너는 믿는다. 그거 알지? "

순범이 태연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쳤다. 나 자신은 못 믿어도 민태연은 오롯이 믿는다는 그 말이 가지는 의미를 다시 한 번 확인시키듯 그렇게. 태연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입매는 천천히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웃는 듯 마는 듯, 마치 생애 처음으로 웃어보는 사람처럼 부자연스러워도 그 의미는 바래지 않을 미소였다.


3.


" 드디어 만났네요, 민태연 검사님. "

태연의 등장에 정현의 눈이 반짝였다. 입가에는 화사한 미소가 피어났다. 지금껏 무료한 시간에 젖어서 나른하기만 하던 그의 얼굴은 정말 반가운 사람을 만났다는 듯 생기로 넘쳐흘렀다.

"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죠? 이거 악수라도 해야 하나요? 진짜 만나보고 싶었어요. "

너스레처럼 계속 흘러나오는 말은 친근함을 담은 공손한 존대어들뿐, 정현은 취조실이라는 서늘한 공간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반응을 계속 보여주었다. 태연은 정현의 환대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시선을 그에게 고정한 채 자리에 앉을 뿐이었다. 취조실 너머에서 그를 응시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눈길. 감정이 아닌 이성으로만 무장한 날이 선 눈매. 정현은 흔들림 없는 태연의 눈을 보며 빙긋이 웃었다. 마치 그런 반응을 기대했다는 듯, 되려 재미있다는 듯. 그는 의자를 바싹 당겨 앉았다. 두 팔을 테이블에 올리고선 깍지를 낀 채 턱을 괴었다.

ㅡ자, 이제 시작해보지.. 민태연! 정현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 ... 당신의 집에서 민진현의 시체를 발견했어. "

" 예상대로 제대로 발견했네요. "

" ..... 왜 죽였어? "

" 누구 말이죠? "

" 박성태, 김정구, 윤진우, 김태민, 민진현. "

태연이 피해자의 사진들을 정현의 앞에 던지듯 내밀었다. 그는 모르는 척 그 사진들을 넘겨보았다. 완전 예술이네, 예술. 이 정도면 미학이지. 잔인하게 살해된 피해자들의 모습을 감상하던 정현이 이내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이런.. 이런.. 민태연 검사님. 손사래까지 치는 게 어지간히 즐거운 모양이었다.

" 당신 정도 되면 무능력과는 거리가 멀잖아. 지금쯤이면 내가 왜 죽였는지 알 텐데.. 다 알면서 굳이 묻는 건 우리 민태연 검사님의 특기인가? 아니면 굳이 내 입으로 확인받고 싶은 건가? 대체 무슨 심보인지 모르겠네. "

정현은 사진을 잘게 찢더니 공중으로 뿌렸다. 흩날리는 조각들 사이로 정현의 얼굴, 조롱이 담긴 비웃음이 비켜갔다.

" 어차피 죽어 마땅한 놈들이야. 그런 놈들이 살아있다는 게 죄악이야. "

" 그들이 죽어 마땅하든 어떻든, 당신이 다섯 명을 죽인 살인마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어. 그들이 죽는다고 해서 '윤현수'가 살아 돌아오지는 않아. "

현수라는 이름 앞에 정현의 얼굴이 새하얗게 굳었다. 지울 수 없는 기억, 상흔으로 남아버린 존재. 그에게 현수는 그러했다. 그렇기에 불식 간에 닥친 '윤현수'는 정현에게서 이성을 앗아갔다. 전에도 그랬듯 지능적인 살인마의 가면을 일제히 거둬버렸다.

" 그 이름, 함부로 입에 담지 마. 당신이 뭘 안다고.. 뼛속까지 시린 괴로움.. 지독하게 사무치는 그리움.. 벌버둥치면 칠수록 끝도 없이 삼키려 드는 그 늪.. 그게 뭔지 당신이 뭘 안다고.. 감히 우리 현수를 들먹이는 거야. "

정현이 이를 바득 갈았다. 위험하게 빛나는 눈동자는 흡사 야생동물 같았다.

" 안다고 말하고 싶겠지? 응? 당신은 다 안다고 생각할 거야. 당신 여동생.. 그래, 민태연 여동생. 킥킥.. 7년 전에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 그렇지? 하지만.. 틀렸어. 당신은 몰라. 전혀, 아무것도. 당신이 알았다면 그렇게 멀쩡하게 살 수는 없는 거야. 그 미칠 듯한 고통, 차라리 죽는 게 나았을 그 괴로움을 어떻게 안다는 거야. 그래서... 그래서 내가 알려주려는 거야. 천천히, 제대로, 평생 잊지 못할 순간으로.. 내가 그렇게 만들어줄 거야. 알아들었어? "

울다가 웃었다가, 화를 내다가 기뻐했다가, 정현의 감정변화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윤현수'와 '민태연'의 사이에서 극과 극의 감정이 오가는 모양이었다.

" ... 나를, 죽이고 싶어? 네가 죽인 다섯 명처럼 그렇게? "

" 글쎄? 어떨 것 같아? 당신이 생각하기에 민태연 최후가 그럴 것 같아? "

타들어가는 네 개의 눈이 맞부딪혔다. 한 치의 양보가 없는 팽팽한 기 싸움. 검사와 범인의 대치상태, 그 이면에 존재하는 같은 상처를 공유한 이들의 자기모순. '민태연'과 '제정현'은 닮았으되 양립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 구실점에 '연지'와 '현수', 그리고 '그녀'가 존재했다.

" 내가 그리는 민태연의 최후는 따로 있지만, 그전에 우선.. 조금 전 당신이 한 말.. 그래, 정정할 것부터 정정해야지. 다섯 명을 죽인 살인마? 아니지.. 아니지.. 그건 아니지. 죄목이 하나 빠졌잖아. 살인마 외에 하나 더 있잖아. 똑똑한 민태연 검사님이 그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설마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지? "

정현이 누구를 말하는지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유정인. 태연이 애써 삼키고 있을 그 이름 석 자를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는 게 되려 더 도발성이 느껴지는, '민태연'을 증오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투영된 다분히 의도적인 발언이었다. 차분히 가라앉은 눈동자와는 달리 꽉 다문 입술, 저도 모르게 쥐고만 주먹. 그런 태연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 정현은 히죽거렸다. 좀 더 날 즐겁게 해 봐, 민태연.

" 근데 말이지.. 또 다른 죄목이 납치 및 살인미수인지, 아니면... "

정현의 눈이 위험하게 번뜩였다. 사냥감을 눈앞에 둔 맹수, 그 찰나의 움직임. 아니면 여섯 명을 죽인 살인마인지는 모르는 일이야. 터엉ㅡ. 의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그보다 더 빠르게 태연이 정현의 멱살을 거머쥐었다.

" 유정인 어딨어-?! 어디다 뒀냐고-!! "

서슬 퍼런 기세가 하늘을 찔렀다. 살기가 가득한 눈동자는 이미 시선만으로 눈앞의 남자를 죽여놓을 듯했다. 어서 말해-!! 말하란 말이야-! 검사로서의 본분에 근거해서 이성으로 다져놓은 '민태연'이 정현의 치명적인 도발에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 그래.. 민태연. 진작 그렇게 나와야지. 지금껏 시답잖은 말만 쓸데없이 늘어놓고.. 참아도 너무 참았어. 그거 병 돼. 참아봐야 병밖에 안 돼. "

입가에 걸린 웃음과는 대조적인, 한 마디 한 마디에 담긴 진심. 칭찬하는 건지 약을 올리는 건지, 아니면 둘 다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거 내가 해봐서 알아. 아주 지독한 병이야.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다니까. 키득. 짧은 웃음이 정현의 잇새를 비집고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한계치를 넘어버린 극한의 고통은 오히려 느끼지 못하고 무감각해지는 것처럼 정현의 눈은 죽음의 그림자로 가득하지만 감정을 비추지 않았다.


4.


취조실을 지켜보는 순범의 마음은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범인의 멱살을 틀어쥔 태연은 위태롭게만 보였다. 범인이 노리는 게 무엇인지 알면서도 도발 당할 수밖에 없는 그 마음. 어찌 이해하지 못할까. 되려 이해하고도 남기에 지금 태연의 상황이 위험하기만 했다. 들어가서 말릴까 말까? 갈등이 막 끓어오르지만, 자신이 끼어들 자리가 아님을 직감하기에, 순범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마음처럼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 아, 진짜.. 저놈 저거.. 아우.. "

범인이 당장 코앞에 있으면 비 오는 날 먼지 나듯이 패주고 싶은 심정이 연신 외마디에 실려 흘러나왔다. 때마침 울리는 휴대폰은 샌드백 되기 안성맞춤인 '똥만이'. 전화를 해도 어떻게 이럴 때만 하는 건지, 언젠가 정인이 태연의 차가운 기세에 떠밀려 취조실에서 나온 후 전화 건 동만이에게 향했던 싸늘한 눈총이 이해되는 순범이었다.

" 최동만. 쓸잘 데기 없는 소리면 너 오늘이 제삿날이다! "

『 제삿날은 나중에 자진 반납할 테니까.. 지금 전화가... 유 검사님이...  』

동만은 뭐가 그리 다급했던지 전후 사정은 다 생략하고 단답형으로 핵심단어만 툭 던져놓았다. 뭐, 유 검사? 뭔 전화? 똑바로 말 안 할래? 순범이 답답하다는 듯이 동만을 윽박질렀다. 아니, 그러니까요. 유 검사님 말이에요. 그래, 유 검사가 뭐? 말을 해. 동만의 음성이 높아지자 순범도 덩달아 높아졌다.

『 방금 병원에서 전화를 받았어요. 민 검사님 휴대폰으로... 』

" .. 유 검사 얘기하다가 갑자기 병원은 뭐야? "

『 아니.. 유 검사님이 병원에 있다고, 방금 민 검사님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다고요-! 』

" 뭐? 유 검이 지금 병원이라고? "

뜻밖의 낭보, 그러나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일에 순범은 어안이 벙벙했다. 정인이 범인에게 납치된 이후 행방을 찾을 수 없던 그녀였다. 사진으로 본 피투성이 모습과 태연에게 전화를 건 범인이 잠시 들려줬던 목소리만이 전부였을 뿐, 아직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생사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진짜야? 너 지금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거 아니지? 되묻는 와중에도 믿어지지가 않는지 순범의 목소리가 자꾸만 격해졌다.

" .. 그래서 병원은? 어느 병원이라고 해? "

『 .. 한국대 부속 병원이요. 』


「 ..... 한국대 부속 병원이야. 」


순범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온 그 말은 동만이의 것이 아니었다. 한국대 부속 병원, 담당의 이현. 확인 사살하듯 읊조리는 담담한 목소리의 주인은 확실히 동만이가 아니었다. 뭐야, 이건? 취조실 안의 대치 상황은 변함없었다. 태연은 여전히 범인의 멱살을 거머쥔 채였고, 범인은 반항조차 하지 않았다. 다만, 범인이 던진 한마디가 취조실에 가득한 서릿발 같은 위험을 깨끗하게 잘라버렸을 뿐이었다.


5.


명패에 쓰인 환자명 '유정인'에 심장이 덜컹거렸다. 그 아래 걸린 '절대 안정'이라는 팻말에는 호흡이 떨렸다. 피가 말랐다. 병실 문은 마치 거대한 지옥의 입구처럼 느껴져서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특별히 10분만 면회를 허락한다는 담당의의 허락이 떨어졌지만, 태연은 쉽사리 문을 열 수가 없었다. 보다 못한 순범이 재빨리 문을 열었다.

" 유 검사, 이게 다 뭐야?!.. "

" .. 유 검사님-! "

태연을 지나쳐 먼저 정인에게 다가간 순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동만은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듯했다. 죽은 듯 누운 정인을 바라보는 두 사람은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 정현이 웬 여자를 부탁하면서 명함을 주더군요. 명함의 주인에게 여자가 여기 있다고 알려달라고. 잘 치료해달라면서 그냥 가버리더군요. 』

황급히 달려간 병원에서 만난 의사,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ㅡ제정현의 외향에 비한다면 그 선배로 너끈히 보이겠지만, 나이대로 보아 필시 동년배의 친구일 듯한 남자는 차갑게 굳은 태연이나 어쩔 줄 모르는 동만, 그리고 다급한 자신과는 달리 놀랄 것도 급할 것도 없다는 듯 정인이 병원에 온 경위를 짤막하게 이야기했다.

『 아니, 피범벅이 된 여자를 데리고 왔는데 그걸 그냥 넘어간 거에요? 경찰에 신고할 생각 같은 건 안 한 겁니까? 』

『 말 그대로 피범벅이었으니까요. 일단 사람부터 살리고 봐야죠. 』

의사들이 무감각하다는 말은 익히 들었지만, 막상 이런 상황에 직접 처하자 화가 나서 언성을 높였을 때, 이현의 말은 너무도 단호해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검사의 본분이 범인을 검거하는 것이라면, 의사의 본분은 사람을 살리는 것. 제 입으로 피범벅 운운했지만, 사람부터 살리고 봐야 했다는 이현의 말이 가지는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정인의 상태에 대해서 추측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병실로 향하는 동안, 이현이 이야기하는 정인의 상태에 대해서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이 본심이었다. 병원 특유의 소독 냄새가 오늘따라 폐부를 찔렀던 것도 비단 그런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 이런 죽일 놈 같으니라고. 멀쩡한 사람을 어쩌자고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거야. "

" 우리 유 검사님,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

" 아팠겠지. 말도 못하게 아팠겠지. 아주 회를 떴는데 안 아플 리가 있겠냐-! "

" .. 유 검사님, 깨어나시겠죠? "

" 당연히 깨어나지. 너 헛소리할래? "

순범은 습관처럼 동만의 뒤통수를 후려치려다가 멈칫했다. 동만의 너머로 보이는 태연. 그는 마치 몸이 굳어버린 사람처럼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다가오지도 멀어지지도 못하는 모양새가 꼭 정인을 향한 태연의 마음을 그대로 말해주는 듯했다. 순범이 갑자기 동만의 등을 떠밀었다. 엑-! 황 형사님, 뭐에요? 뭐긴 뭐야, 퇴장하는 중이지. 순범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동만이 버텨볼 새도 없이 그대로 끌고서 병실을 나갔다.

탁ㅡ. 문이 닫히자 병실에는 적막감이 감돌았다.
눈을 뜨지 않는 여자와 눈을 뗄 수 없는 남자, 오직 두 사람만이 전부인 그곳ㅡ.

" .................... 유정인. "

한참 만에 흘러나온 태연의 한마디는 항상 그녀를 향했던 부름이었다. 하지만 특별할 것도 무엇도 없을 그녀의 이름 석 자는 마치 주문처럼 태연을 정인의 곁으로 인도했다. 천천히, 흔들림 없이, 붙잡힌 시선 그대로.

새액-새액ㅡ. 호흡기 돌아가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굳게 닫힌 창문 아래, 하얀 시트가 곱게 펼쳐져 정인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군데군데 작은 상처가 난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다. 그렇지 않아도 속살처럼 하얀 얼굴은 핏기가 완전히 가시자 시체처럼 차갑기만 했다. 그다지 길지도 않은 머리카락은 단정치 못하게 흐트러져 베개와 머리 사이에 짓눌렸다. 환자복 사이로 드러난 두 팔은 안쓰러울 정도로 자잘한 상처들로 가득했다. 겉보기로도 충분히 환자, 그 이상인 그녀가 저 시트 아래 얼마나 더 많은 상처를 숨기고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 어깨와 가슴 부근을 중심으로 등과 팔까지, 자상의 흔적이 많습니다. 그 깊이로 봐서는 두 차례 나누어 찔린 것으로 보입니다. 다행하게도 급소는 피했기에 생명에 큰 지장은 없지만, 워낙 출혈이 많았던 데다가 상처도 깊어서 회복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겁니다. 』

육체의 고통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치유될 것이다. 하지만 그 마음에 새겨진 상흔은 어떻게 씻을 수 있을까. 정인이 눈을 떴을 때, 그 눈동자 안에 예전처럼 빛이 담겨 있을까. 유원국, 그 이름만으로도 아주 괴로운 그녀에게 또 다른 트라우마가 새겨지고 말았다. 그녀의 마음이 이대로 죽어버린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 ...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

몇 번이고 되뇌었던 그 말. 미안하다. 이렇듯 다치게 해서 미안하고, 그 마음에 상처를 입혀서 미안하고, 범인을 이해하기에 또한 미안하고, 그런 자신이 용납이 안 돼서 죽을 만큼 미안하고. 평생토록 사죄한들 용서받을 수도 없고 지은 죄가 사라지지도 않겠지만, 다른 말은 할 수가 없다. 다른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녀에게 더는 족쇄를 채워서는 안 된다. 하지만ㅡ.

' ................. 정인아 .............. '

닿을 듯 말 듯 스치는 그 손길이 애틋했다. 차마 소리 내지 못하는 그녀의 이름이 애달팠다.

' .. 살아줘서 고맙다. 죽지 않고 이렇게 와줘서, 정말.. 고맙다, 정인아. '

그간 깊게 감춰둔 마음이 쏟아져 내렸다. 어떤 이유로든 인정할 수 없었고, 또한 인정해서도 안 되기에 끝까지 외면하려 했던 '유정인'을 향한 '민태연'의 순수한 열망. 그녀의 손을 살며시 쥔 그의 손처럼 부드럽게, 그녀의 감은 눈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처럼 온화하게, 사슬에서 풀려난 그 마음이 처음으로 형태를 띄웠다.

by 아르튀르 | fanfic |